"최악의 남편"…'주식 쪽박' 뒤 집 쫓겨난 증권맨의 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3-12-30 11:45   수정 2023-12-30 11:49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그 남자를 알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자식을 5명이나 둔 가장이면서도,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무책임하게 “그림을 그리겠다”며 세상을 떠돌아다녔으니까요. 그의 이기적인 언행과 허세는 늘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예술가는 그 남자가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남자의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자는 태평양의 머나먼 섬으로 도망치듯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은 바닷바람을 타고 여전히 들려왔습니다. 어린 원주민 소녀들과 아이를 만든 걸 비롯해 현지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렸거든요. 결국 그는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외롭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습니다. 그 사람, 폴 고갱은 위대한 화가라고. 때 묻지 않은 인간의 근원적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숭고한 인물이라고. 그리고 이런 평가는 고갱이 죽은 후 대세가 됐습니다. 확실히 그의 그림에는 그전에 있던 어떤 미술과도 다른 아름다움, 누가 봐도 곧바로 고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특색이 있었습니다. 이런 고갱의 작품은 피카소와 마티스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의 거장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줬습니다.

이기적이고 냉담하고 무책임한 가장. 그러면서도 인류의 순수와 원시의 세계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헌신한 예술가. 오늘은 이 두 극단적인 평가를 오가는 모순적인 인물, 폴 고갱의 이야기를 풀어 봅니다.
건실한 남편에서 ‘식충이 불청객’ 되다
고갱은 평생 두 개의 전장(戰場)에서 싸웠습니다. 하나는 탁월한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한 싸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임감 있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려는 싸움이었습니다. 예술적 싸움에서 고갱은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가장이 되려는 싸움에서 그는 형편없이 패배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성격 탓이었습니다.

고갱의 성격이 처음부터 그 모양이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돈 잘 버는 건실한 청년이자 훌륭한 가장이었거든요.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그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났고, 18살 때부터 5년 동안 상선과 해군에서 배를 탄 뒤 23살의 나이로 파리의 한 증권거래소에 취업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30대 중반까지 고갱의 삶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덴마크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뒤 잇달아 건강하고 예쁜 아이가 태어났고, 경기가 워낙 좋았던 덕분에 주식 투자로 ‘억대 수익’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고갱은 취미도 고상했습니다. 주말이 되면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사주며 그림 그리기를 한 수 배웠습니다. 훌륭한 스승을 둔 데다 재능도 뛰어난 덕분에 ‘주말 화가’답지 않은 대단한 성과도 거뒀습니다. 직업 화가도 작품을 내놓기 어렵다는 프랑스 최고 권위의 전시회 살롱전에 1875년 당당히 작품을 출품한 겁니다. 1880년 제5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는 드가를 비롯한 여러 대가들이 그와 작품을 바꿔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1881년 거품 붕괴로 파리 증시가 무너지면서 고갱의 삶도 무너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는 직장을 잃었고, 갖고 있던 주식도 휴지 조각이 됐습니다. 전업 작가가 돼볼까도 생각했지만 미술시장도 형편없이 쪼그라든 상황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 어쩔 수 없이 고갱은 덴마크로 가족과 함께 건너가 처가살이를 시작합니다.


장인의 권유로 섬유 판매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덴마크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고갱이 파는 상품에 대한 수요도 없었습니다. 결국 고갱은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처가 식구들은 고갱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비웃으며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역시 그 분위기에 휩쓸려 고갱을 매도했습니다. 훗날 고갱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덴마크가 혐오스럽다. 사람도 기후도 모두. 최악의 식인종도 덴마크 집주인보다는 낫다.”

결국 고갱은 쫓겨나듯 집을 떠났습니다. 화가로 돈을 벌겠다는 자기 의지가 반, 꼴 보기 싫은 불청객을 쫓아내려는 처가 식구들의 뜻이 반이었습니다.
태평양 섬에 다녀오다
그렇게 파리로 돌아온 고갱. 위대한 화가가 돼 보겠다며, 그래서 처가 식구들의 콧대를 꺾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겠다며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불황 탓에 고갱의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밥벌이를 위해 푼돈을 받고 전단지를 붙여야 하는 나날. 그러면서도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날들. 고갱은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그림, 충격적인 그림을 그려야 해. 그게 내가 살 길이다.”


그 와중에 쇠라라는 젊은 천재가 점묘법을 들고 나타난 건 큰 충격이었습니다. 고갱도 쇠라와 같은 전시회에 작품을 냈지만, 언론과 미술 비평가들은 오직 쇠라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췄습니다. 고갱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 빌어먹을 점들! 더 새로운 게 필요해. 뭐가 없을까? 그래, 열대의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는 거야. 내 상상력과 자유를 제약하는 여기만 아니라면 위대한 예술을 할 수 있을 텐데. 자연과 원시로 돌아가 그림을 그리겠어. 떠나자.’

문제는 목적지. 파리에서 너무 멀고 외딴곳은 일단 제외해야 했습니다. 식사와 그림 재료를 준비하기도 어려운 데다 고갱이라는 이름이 아예 잊힐 수도 있으니까요. 파리와 적당히 멀면서도 적당히 가깝고, 직접 가기는 어렵지만 연락은 어찌어찌 닿을 수 있는 장소. 그런 계산 끝에 고른 건 중부 아메리카의 파나마와 마르티니크 섬이었습니다. 어차피 계속 파리에 있어 봤자 되는 일도 없겠다, 서른아홉 살의 고갱은 계획도 없이 그야말로 훌쩍 떠났습니다.


하지만 도피 끝에 도착한 곳은 낙원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갱이 갔던 곳들은 생각보다 훨씬 문명의 때가 묻어 있으면서도, 생각보다 훨씬 살기 불편했습니다. 그림을 사겠다는 고객도 없었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아서 여전히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요. 밤이면 수많은 모기가 살을 뜯었습니다. 평생 그를 괴롭히는 병(매독으로 추정)도 이때 증세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림도 몇 점 그리지 못하고 몇 달 만에 금세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성과는 있었습니다. 열대 지방의 풍경이 고갱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는지, 고갱의 실력이 무르익을 때가 돼서였는지, 둘 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시기부터 특유의 독창적인 그림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겁니다. 덕분에 파리에 돌아온 고갱은 그럭저럭 호평받고 그림도 약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바꾸고 안정적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요.
프랑스, 고흐, 그리고 다시 타히티로
여전히 앞길이 막막했던 마흔의 고갱 앞에 나타난 건 네덜란드 출신의 형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이자 갤러리스트인 테오 반 고흐였습니다. 빈센트는 고갱을 동경한다며 “같이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고갱은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같이 살면 집세를 아낄 수 있는 데다,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가 자신의 그림을 사주고 자금을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둘의 사이는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한동안 함께 살던 둘은 크게 싸우고 헤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고흐가 자기 귓불을 잘라내는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고요. 둘 중 누군가의 일방적인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고흐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고갱에게 ‘멘토’역할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고갱의 자신감은 허세였을 뿐, 그 역시 내면은 고흐 못지않게 취약했습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한 고갱의 평가는 그의 성격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덧씌웠습니다. 고갱은 고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단한 일이야. 그의 고통이 마침내 끝났구먼.” 나중에 고흐의 추모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도 그는 이렇게 냉혹하게 얘기했습니다. “미친 사람이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다는 얘기가 퍼지면, 우리 화가들 모두에게 안 좋을 수도 있네.”

한때 같이 살았던 동료에 대해 고갱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했던 건, 고흐의 최후와 자신을 겹쳐 봤기 때문일 겁니다. 두 화가는 그 누구보다 서로 닮아있었거든요. 예술의 본질에 집착하고,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그래서 고갱에게는, 미쳐버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반 고흐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나도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서였을까요. 고갱은 다시 프랑스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마흔 두살이던 고갱은 1891년 남태평양의 섬 타히티로 떠납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편지는 이랬습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에게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내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소. 3년 안에 나는 이 전투에서 승리할 거요. 그리고 우리 가족은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고. 당분간 잘 지내시오. 내가 돌아오거든 다시 결혼합시다.” 그리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섬, 그리고 최후


고갱이 꿈꿨던 원시와 낭만의 세계와 달리, 타히티는 이미 문명의 때가 묻은 관광지가 된 지 오래. 원주민의 예술을 기대했지만 시장에 널린 건 싸구려 유럽 공장제 기념품들 뿐이었습니다. 고갱의 어려움은 계속됐습니다. 그는 이주민 사회에도, 원주민들 사이에도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그림은 여전히 팔리지 않았고 돈은 없었습니다. 30대 후반부터 심해지기 시작한 병 때문에 그는 항상 아팠고, 그의 썩어들어가는 살에서는 악취가 났습니다. 정신도 조금씩 오락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고갱은 독보적인 예술을 쌓아 올렸습니다. 고갱 자신이 착각했던 것처럼, 타히티의 환경과 주민들 덕분은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타히티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배우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고갱이 캔버스에 그린 아름다운 주민들과 풍경, 분위기는 반쯤만 진실이었을 뿐 나머지는 고갱의 상상이자 창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당시 실제 타히티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현실과 상상의 이런 차이는 그의 편지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같은 편지에서 “열대 낙원인 타히티에서 사는 건 정말 환상적이고,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살아갈 엄두가 안 난다”라고 하다가도 “여기는 정말 불편하고 더러운 거지 같은 곳인 데다 가난하고 아파서 죽고 싶다”고 말을 바꾸기도 했으니까요. 고갱이 사랑한 건 타히티를 비롯한 현실의 장소가 아니라 자기 상상 속 타히티였던 겁니다. 타히티라고 생각했던 영감의 원천도, 사실은 자기 창조력이었고요. 하지만 고갱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이후 고갱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는 섬을 옮기기도 했고, 아이도 더 태어났고요. 다만 레파토리는 거의 비슷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자신이 보낸 그림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프랑스 평론가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어린 원주민 여성과 동거하고, 쓸데없는 것에 피해의식을 갖고 분노하고, 말썽을 일으키며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그런 삶을 반복하기를 10여년, 고갱은 지병이 악화돼 1903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있을 때 갖은 고생을 했던 고갱은 죽은 후 신화가 됐습니다. 고갱이 살아생전 저평가받았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그의 괴팍한 성격과 기행이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냉정한 성격으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고, 자신을 천재로 포장하기 위해 허세가 심했고, 고흐를 자살로 내몰았다는 소문까지 돌았으니 고갱을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갱이 죽자 사람들은 비로소 그의 그림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흩어져있던 고갱의 작품이 회고전을 계기로 모였다는 점, 미술계의 유행 등 여러 상황이 겹쳤습니다. 당대 최고의 작가 중 하나였던 서머싯 몸이 고갱의 삶을 모티브로 한 소설 <달과 6펜스>를 펴내면서 고갱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고갱은 예술에 모든 걸 바친 위대하고 숭고한 거장이 됐습니다.


다만 최근 몇 년 새 미술계에서는 고갱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서양 백인 남성인 고갱이 식민지에서 원주민들을 이용하고 그들에 대한 편견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10대 소녀들과 결혼해 그들을 착취한 인간 말종이라는 게 비판자들의 주장입니다.

확실히 고갱의 개인적인 삶에는 흠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갱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인성과 별개로 작품성만큼은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 아래 그림입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이 작품은 1897년 고갱이 인생의 최저점에 다다랐을 때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고갱은 끔찍한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렸고, 다섯 남매 중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딸을 잃은 상황이었으며, 타히티에서 자신이 살던 집을 잃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병은 계속 악화돼 다리가 썩어들어가며 악취를 내고 있었고요. 실제로 고갱은 작품이 완성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독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바로 다 토해버리고 살아나기는 했지만요.

그림의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수수께끼와도 같습니다. 그림 속에서는 오른쪽 아래 갓난아이에서부터 왼쪽 아래 과거를 후회하며 슬픔에 잠긴 듯한 노인까지 인생의 모든 국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왼쪽 뒤의 저승사자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갱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은 그 자체가 모순투성이기 때문에. 그러니 삶의 모든 것을 그리자.

고갱의 삶은 실제로 모순투성이였습니다. 고갱은 유럽, 타히티, 자신이 살았던 섬 그 어디에도 진정 속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족이 되기 위해 가족을 떠났고, 문명으로의 탈출을 간절히 바랐으나 누구보다도 문명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순박한 원주민들을 원한다면서도 그들의 말을 배우지 않았고 진정으로 섞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원시의 자연을 원하면서도 실제 자연이 아닌 자신이 창조한 자연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순 속에서 방황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갔던 건, 꿈을 꿨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놓친 길들 사이 어딘가에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그는 항상 놓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이 그 증거입니다. 작품 속 곳곳에는 슬픔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으며 끝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죽고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거대한 순환 과정이 주제입니다.

삶은 모순과 고통으로 가득차 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는 법이지만, 이는 절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래서 이 작품은 결과적으로 희망에 관한 그림입니다. 끝이 있기에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고, 이는 곧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뜻하는 것이므로.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한 해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1년간 대단히 고생 많으셨습니다. 희망찬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i>*이번 기사는 'Paul Gauguin'(David Sweetman 지음)을 중심으로 '폴 고갱'(인고 발터 지음, 김주원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펴냄), 'Gauguin Tahiti'(Paul Gauguin 지음, George Shackelford와 Claire Freches-Thory 기여), 뉴욕타임스 기사 'Is It Time Gauguin Got Canceled?'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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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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